[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4·29 이후 정치 참여 확대됐지만 기반은 여전히 취약 선거구 분산에 1세대 무관심 겹쳐 정치력 신장 발목 차세대 정체성 교육과 정치인 육성 체계 정비가 필수
장태환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 소장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102명의 한인 노동자를 미주 한인 공식 이민사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후 1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인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1970년대까지 7만 명을 넘지 못했던 한인 인구는 이제 2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인구와 경제력의 성장 속도만큼 정치력이 커졌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인은 1952년이 돼서야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정치 참여의 출발 자체가 늦었던 셈이다.
▶4·29 이후 달라진 정치 의식
미주 한인사회가 정치력의 중요성을 절감한 계기는 1992년 4·29 폭동이었다. 경제적 성공에 집중했던 한인사회는 한인타운이 불타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줄 정치인이 없다는 현실을 확인했다. 이후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 속에 정치 참여와 권익 신장 운동이 본격화됐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앤디 김 연방상원의원을 비롯해 메릴린 스트릭랜드, 데이비드 민, 영 김 연방하원의원과 실비아 루크 하와이주 부지사, 최석호 가주 상원의원 등 한인 정치인들이 연방과 주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방정부와 교육위원회 등에서도 한인 정치인들이 진출했다.
유권자 등록과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풀뿌리 단체들의 역할도 커졌다. 미주한인유권자연대, 시민참여센터, 한미연합회, 미주민주참여포럼 등은 한인 밀집 지역에서 유권자 등록을 돕고 한글 선거 가이드를 배포하는 등 참여 확대에 나서왔다. 한인사회를 정책 결정 과정에 연결하는 통로가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것이다.
▶숫자 늘었지만 참여 기반 취약
그럼에도 한인 정치력이 넘어야 할 벽은 적지 않다.
첫째는 정치 참여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이다. 한인을 포함한 아시안 이민자들은 오랜 기간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됐고, 부모가 투표하고 자녀가 그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정치 참여를 배우는 경험도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1.5세와 2세도 정치 참여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언어와 문화 장벽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단순히 투표용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선거 제도와 지역 현안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하면 투표권이 있어도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기 어렵다. 이민자 비중이 높은 한인사회에서는 이런 정보 격차가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 구조적 문제로 작용한다.
정치에 대한 불신도 무시하기 어렵다. 모국에서 정치 부패와 각종 스캔들을 경험한 이민자들에게 정치는 신뢰보다 경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한인이나 아시안 정치인의 비리와 구속 사례 역시 공동체 전체의 정치 불신을 키우고 참여 의지를 떨어뜨릴 수 있다.
둘째는 1세대의 관심이 미국 정치보다 한국 정치와 경제에 더 많이 쏠리는 현상이다. 미국에 생활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시의원과 교육위원, 주의원 선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생활과 직결되는 정책 결정 과정과 한인사회 사이에 거리가 생기는 이유다.
정당 지지가 분산되는 점도 한인사회의 특징이다. 한인과 아시안 유권자는 다른 소수계에 비해 공화당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았다가 최근 민주당 지지가 늘어나는 흐름을 보여왔다. 동시에 무소속 비율도 적지 않다. 표가 여러 정당으로 흩어지면 어느 한 정당 안에서 조직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다.
한인사회만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다. 숫자로는 여전히 소수인 만큼 타민족·타커뮤니티와의 연대가 중요하다. 풀뿌리 운동 역시 한인 내부의 결집에 머물지 않고 다른 소수계와 공동 현안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확대돼야 한다.
▶한인타운 쪼개지면 표도 분산
선거구 문제도 한인사회가 오랫동안 겪어온 구조적 장애물이다. LA한인타운은 과거 6개 시의원 선거구로 나뉘어 있었고 이를 하나로 묶기 위한 운동까지 벌어졌다. 지금도 여러 선거구로 나뉘어 있다.
한인 인구가 밀집해 있어도 표가 여러 선거구로 흩어지면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주민들이 같은 생활권과 공동체 의식을 공유해도 선거구가 갈라지면 표의 힘은 분산된다. 한인타운을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묶을 수 있도록 하는 선거구 문제는 정치력 신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성공한 2세, 정치에 무관심
차세대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한인 1.5세와 2세 가운데 명문대를 졸업하고 의사·변호사·엔지니어·바이오텍 등 전문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은 많다. 그러나 개인적 성공이 곧 공동체 참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를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의 약화에서 찾는다. 자신을 한인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인사회의 현안에 관심을 갖거나 정치 과정에 참여할 이유도 약해질 수 있다.
정치 참여의 문제를 단순히 “투표하라”고 독려하는 것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다. 차세대가 왜 한인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AP 한국어도 정치력과 연결
이런 점에서 정치력 신장은 정체성 교육과도 연결돼야 한다.
내가 AP 한국어 추진에 참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P 한국어는 단순한 언어 시험이나 고교 과목의 문제가 아니다. 차세대가 고교와 대학에서도 한국어와 문화, 역사를 지속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가 될 수 있다.
한국계라는 뿌리를 이해하고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정체성을 갖는 과정이 결국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미주 한인 청소년에게 한인 롤모델을 가르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영옥 대령은 자신을 “100% 미국인, 100%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새미 이 박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남긴 배우 필립 안처럼 미국 사회에서 장벽을 넘어선 한인들의 역사도 있다.
그러나 정작 많은 한인 청소년은 이들을 알지 못한다. 차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성공한 한국계 인물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미주 한인 역사를 배우는 교육도 필요하다. 차세대 교육에 대한 투자가 공동체 의식을 키우고, 장기적으로 정치 참여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정치인 만드는 ‘파이프라인’ 필요
결국 가장 시급한 것은 한인 정치인을 우연히 한두 명씩 배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키워낼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일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청년이 보좌관으로 경험을 쌓고, 지방정부와 주의회를 거쳐 연방 정치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인재와 재정,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특정 후보가 등장할 때마다 그때그때 모금하고 지원하는 방식만으로는 정치력을 지속시키기 어렵다. 후보를 발굴하고 교육하고 경험을 쌓게 하며 장기간 지원할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 자체보다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키우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인 정치력의 다음 단계는 정치인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다.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대변할 사람을 찾아내고 키우고 지원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4·29 이후 한인사회가 정치력의 필요성을 깨달았다면, 이제는 그 정치력을 다음 세대로 어떻게 물려줄 것인지 답해야 할 때다.